하판리 ♧ 하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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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판리
본래 가평군 하면에 속한 지역으로, "너르막골", 또는, 판막골의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아래 너르막골(下廣原幕 골), 또는 하단막골(下端幕 골), 하판동(下板洞), 등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하판리와 상판리 신중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하판리가 되었다. (가평군지 p1125 참조)
이 곳 하판리에는 자연부락으로 석거, 와곡, 모곡, 세구지, 노채 등 5개 마을로 나뉘어지고 있다. 구한말(舊韓末)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이었던 민영환(閔泳煥)은 한때 이 곳을 자주 찾아왔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 백년폭포(일명 무폭포 ; 舞雩暴布)에 이르러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탄식하고 한숨지었다고 한다.
그가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자리에 민영환(閔泳煥)이라 새겨놓은 암각서가 지금도 나라의 내일을 되새겨 보게 한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法興王)때, 인도에서 우리 나라로 불법(佛法)을 전하러 온 고승 마라아미(麻羅阿彌)를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그런데도 현등사는 웬일인지 자주 폐찰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후 보조국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다니다가, 마침 마일리에 있던 절에서 하루를 머무르게 되었다. 그날 밤 보조국사가 칠 흙 같이 어두운 밤에 잠시 문밖으로 나왔는데, 저 멀리 운악산 기슭에서 환한 광채가 비치고 있었다. 하도 괴이하여 지형을 살펴두고는 날이 밝자 그 곳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그곳에는 빈 절터에 등이 하나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 빛의 광채가 너무도 찬란하고 신비하여 그 자리에 절을 중건하고 현등사라고 이름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절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밤마다 괴상한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오기 때문에 스님들이 떠나거나 병들어 죽는 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이 폐찰 되는 일이 생겨난 것인데, 함허 대사가 다시 이 절을 중건하고, 잠시 주지로 머물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함허 대사가 오수에 잠겨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꿈에서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이 절은 음지로 항상 습기가 가득해야 하는데, 물이 부족하여 양기로 가득 차서 음기가 동하고,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곧 바로 절 뒤편 능선을 넘어 가면 물이 흐를 터이니, 그 물을 끌어다가 흐르게 하면 아무 탈도 없을 것이요."하면서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함허 대사가 깜짝 놀라 깨어나니 분명 꿈이었다. 대사는 꿈이 하도 신기하여 곧바로 능선을 넘어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 나섰는데, 과연 그곳에는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함허 대사는 길이가 12자가 넘는 수 100개의 나무로 된 통수로를 만들어 이를 연결하여서 물을 흐르게 하고, 법당에 예불 드리는 정안수로 사용하고, 산신각을 지어 산신령에게 경배 드리니 그날 밤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제부터 이 절은 내가 지켜줄 터이니 대사는 다른 곳으로 나가서 더 큰 불법을 전하도록 하시오." 하고는 산신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후 이 현등사에는 밤이면 들려오는 여인네의 웃음소리도 끊어졌고, 승려들이 절을 비우고 떠나는 일도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함허 대사가 물을 끌어다 만들어 놓았던 돌우물이 그 옛날의 정감을 먹음은 채 말없이 놓여 있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감회를 더욱 새롭게 해준다고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극락전 아미타불상의 후불탱화와 관세음보살상 후불탱화는 1759년 2월에 제작한 것으로 현등사가 자랑하는 문화재이다. 또 대웅전 용마루에는 고려청자가 있었고, 효령대군의 친필로 만든 병풍도 있었다고 하는데, 6·25 전후에 분실하였다고 한다. 또한 운악산 경내에는 지장암, 약수암, 미라암등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모두 폐찰되어 버렸고, 다만 약수암이라고도 불렀던 지장암 부근 바위의 약수는 중풍에 효험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19년(光海 11년)에 제작한 현등사 범종은 그 섬세함이 신비에 가까우며, 울창한 숲 속 저편까지 울려 펴지는 목탁소리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와 더불어 현등사의 정취을 더욱 빛내주고 있으니, 그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로다.
현등사 입구 언덕 위에는 삼충단(三忠壇)이 있다. 이 삼충단에 모셔진 삼충신(三忠臣)은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최익현(崔益鉉), 세 분인데, 이 분들은 모두가 구한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로 매년 양력 11월에 이 곳 삼충단에서 추모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민영환〔閔泳煥(1861-1905)〕
민영환의 자는 문약(文若)이고, 호는 계정(桂庭)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61년 병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미국 공사로 있었다.
1896년 3월 러시아 황제 리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불란서·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신문명에 밝았으며,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는 양복 입는 습관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귀국 후 참정(參政)에 올라, 훈장조례를 처음으로 공포했으며, 사신으로 여러 차례나 해외에 나가 공을 세워 훈 1등에 이르렀다. 그 후 외부·학부·탁지부대신(外部·學部·度支部大臣)을 역임하며, 나라의 기강과 운명을 바로 잡으려고 분투하였으나,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가 왕의 시종 무관장으로 있을 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형세에 이르니,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보호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며, 소위 조약에 날인한 5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서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추서 받았다.
(가평의 역사 인물지 423P 참조)
◇ 조병세〔趙秉世(1827-1905)〕
조병세의 자는 치현(穉顯)이요, 호는 산제(山齋)이며,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그는 1827년(순조 27년)에, 현감 조유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리가 밝았으며,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음보(陰補)로 참봉을 지내다가 32세 때인 1859년(철종 1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비로소 사관에 들어갔고, 1864년(고종 1년)에는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1874년(고종 11년)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1877년에는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서 의주부윤·대사헌 등을 거쳐, 1887년(고종 24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이듬해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889년(고종 26년)에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고종 30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중추원 좌의정이 되고, 이어 고종의 고문격인 특진관(特進官)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가평에 은퇴해 있었다.
1896년에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책(時務策) 19조를 상소했고, 1898년에 의정부 대신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노·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여러 나라로부터 한국에 있어서의 특수이익을 인정받게 되자, 곧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획책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진회(一進會)라고 하는 친일 단체를 만들어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선전하게 하고, 일본 정계의 원로인 이또오를 파견하여, 일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와서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보호조약을 승인토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조약이 거부되자, 그들은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던 참정 한규설(韓圭卨)을 회의실 밖으로 끌어내고, 외부(외무부)로 가서 외부대신의 도장을 갖다가 강제로 합병조약에 날인하여 버린 것이다.
이 을사조약의 내용은 한국의 외교에 대한 관계와 사무를 일본이 통치 지휘한다는 것이었고, 앞으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거치지 아니하고는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일본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일을 관리하기 위하여 황제 밑에 통감(統監) 한사람을 둔다는 것, 등이었으니 요컨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병세는 억울함을 참지 못해 통곡하면서,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나는 대대로 국록을 먹던 신하로서 나라와 함께 죽음이 마땅하다.」
고 말하고, 79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즉시 대궐로 나아가 목메어 울며,
「나라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사유물이 아니므로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라도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정한 법이 반드시 널리 원임 대신 이품(二品)이상의 관원과 밖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까지 의논하여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이 청구하는 5개 조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한, 두 신하가 임금님의 의사를 받들지 않고, 국법마저 따르지 않으며, 제 마음대로 가타부타하여 나라를 적에게 준단 말입니까? 법을 무시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그 죄는 일 만 번 죽어도 가벼울 것입니다. 주무대신 박제순(朴齊純) 이하, 가(可)자를 쓴 각 대신을 빨리 국법으로 다스려서 공론(公論)에 사례하시고, 곧 조서를 내리시어 조약을 취소하고, 각국에 성명을 내리소서. 만일 이러한 윤허(允許)를 받지 못한다면 신은 천폐(天陛)에 머리를 부수어 죽겠나이다.}
하고 강경하게 아뢰니 황제가 노령에 고생함을 위로하며, 인후병을 빙자하면서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물러난 조병세는 자신의 상소가 별로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원임 의정대신의 자격으로 각부의 통첩을 보내, 대소관원의 궁내 집합을 통고한 다음,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등 69명 연서로 불법적인 조약의 취소와 적신(敵臣)들의 처형을 요청하고,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林權助)에게도 글을 보내어, 그들의 여러 번에 걸친 우리 나라에 대한 독립보전의 약속을 어기고, 병력으로 위협하여 외교권을 강탈하는 행동을 공박하며, 조약의 취소를 통해 국제적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영국·프랑스·미국·독일·이태리 등 5개국 공사에게도 글을 보내어, 공약을 어기고 외부의 인장을 강탈하여 불법 조약을 조작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웃 나라 간의 의리로 국제공법의 규정을 살펴 회동(會同), 담판해서 조약의 위법성을 성명(성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도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27일 일본 헌병들에 의하여 표훈원(表勳院)에 강제 구금 당해 버리고 말았다.
조병세가 구금된 뒤에는 민영환(閔泳煥)이 대신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가 조약의 폐기를 요청하였지만, 그도 역시 연행되어 평리원에 구금되었다.
그 후 조병세는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가평에 추방되었으나, 12월 1일, 다시 상경하여 대한문 밖에 엎드려, 강제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일본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를 체포하여 억지로 교자에 태워가니 대세를 어찌 할 길 없었다. 이미 일사보국(一死報國)을 각오한 바 있는 조병세는 교자 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극약을 꺼내어 마시고, 집안의 조카인 조민희(趙民熙)의 집에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그의 용태가 위독한 지경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들이 의사를 부르느라 수선들을 떨었으나, 이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위 이용직(李容稙 : 가평읍 금대리 출신으로 판의금 부사를 지낸 이희갑의 증손이다.)
「이놈들아! 우리 대한의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코자 하는데, 너희 무리들이 무슨 일로 간여하며, 또 돌아가시는 분을 욕보이려 하느냐!」
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니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이렇게 조병세는 죽으나 사나 오로지 나라를 충성심으로 섬기다가 순국하니, 이때가 1905년 12월 1일 오후였다.
조병세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자신의 부친상을 당한 듯이 슬퍼하며 애도했다고 하니, 그의 생애야말로 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 관료로서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귀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고종황제도 그의 충절을 아끼고 후회했다고 하며, 황태자를 보내 특별한 예우를 갖춰 장사지내도록 하고,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렸다.
그가 국민들에게 남긴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 : 나라 안의 벼슬아치와 백성에게 이별을 고하는 글 ; 유서)는 너무도 유명하여 국민 모두가 애송하였으며, 내용은 번역문으로 소개한다.
"오직 한번 죽음으로서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 인민에 보답하노라
그러나 여한이 되는 것은 국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황상(皇上 : 임금)의 위엄이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라.
우리 전국 동포는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각자 분발하여 나라를 도와서
우리 독립의 기초를 길러
나라가 망한 부끄러움을 설욕한다면
나는 비록 구천지하에서 나마
춤추며 기뻐하리니
각자 분발하여 힘쓰도록 하오".
그가 자결직전에 써서 올린 유소(遺疏)는 이러하다.
"신의 죄는 깊고 정성은 엷어서
살아보았자
천의를 감동시킬 수 없고
역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늑약을 제거하지 못한 즉
부득불 한번 죽음으로서
국가에 보답하려는 고로
폐하께 영결을 고 하나니
신이 죽은 후에라도
분발하시고 결단을 내리시어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5역신을
대역 무도한 죄로 처형하시어
천지신인에게 사례하시고
각국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을 폐기하시고
국명을 회복하시면
신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살아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가평의 역사 인물지 p417 참조)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최익현의 자는 찬겸(贊謙)이요. 호는 면암(勉庵)이고, 본관은 경주(慶州)로서 신라시대의 석학 최치원(崔致遠)의 28대 손이다. 14세 때 양평 벽계에서 이항로(李恒老)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결과, 19세 때는 스승인 이항로와 예와 인물 등에 관하여 논의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22세때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듬해 문과(明經科)에 급제하였으며,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고, 그가 30세가 되던 1862년 충청도 신창 현감으로 나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부임한지 1년도 못 돼, 모든 백성들이 청렴과 교화를 크게 칭송하였다.
이듬해 예조좌랑·성균관 직강·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다가 1868년 사헌부 장령에 특배되었다.
이때 최익현은 사헌부 장령으로서 대원군 이하응의 실정을 탄핵하였다. 그는 이로 인하여 관직을 삭탈(削奪) 당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전국에 떨쳤다. 그 후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호초참판 등의 벼슬이 제수 되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더욱 격렬하게 국정을 비판하였다. 1893년 그는 호조참판의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그 끝 부분에 오조 대의(五條 大義)를 붙여 이런 상소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직하고 신랄한 폭탄상소는 마침내 대원군의 10년 집권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독재를 끝나게 하였지만 관리들의 공격을 받아 금부에 수감되었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제주도에 위리 안치(圍籬 安置) 되었다가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상경하여 홍재구·유인석(洪在龜·柳麟錫) 등 50여명과 더불어 수호조약의 반대를 외치며, 광화문 앞에서 밤을 새우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그 유명 오불가척화상소(五不可斥和上疏)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또 다시 금부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흑산도로 옮아 다니는 유배생활 4년, 그의 나이 47세에 석방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당시 나라는 의복변제령(衣服變制令), 임오군란·갑오정변 등으로 나라가 어지럽던 시기였다.
갑오경장의 소식을 듣고 서울에 이르러, 분문(奔問)하게 되거니와, 그 해 7월 공조판서라는 벼슬자리를 놓고 장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제 나라의 국권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 있으니 누구에게 사직상소나마 올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이듬해 민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졌는데, 그는 단발령이 전국으로 시행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하며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이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순검 10여명을 이끌고 그를 체포, 위협하였으나, 일본화 되어 가는 한 징조인 단발에는 결코 응할 수 없다는 그의 뜻을 굽히지는 못했다.
1896년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그에게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을 회유하고 진압시키라는 선유대원(宣諭大員)의 칙령이 내렸으나, 곧 사직상소를 올리고, 오히려 의병의 충정과 불가피성을 내세워 함께 의론(議論) 하였다. 그 후에도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궁내부 특진관·중추원의관·의정부 찬정·경기도 관찰사 등의 발령이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면서, 일본배척과 매국역신들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나 체포·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니, 그는 그 해 11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렸으며, 5조약 반대의 재차 상소를 올리며,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을 발포하였다.
이듬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제 마지막 수단인 무력항쟁의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사당에 이 사실을 고하고, 4월 호남지방으로 떠나, 태안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의 의기(義旗)를 꽂고, 각 군으로 격문을 보내 그들의 죄목을 성토하였으며, 정읍·순창으로 호군 하였는데 이때, 그의 의병부대는 제자 박병찬·임락(朴秉瓚·林樂) 등이 포함되어, 80여명이었다.
그 해 6월, 전주 관찰사 한창진·순창군수 이건용 등이 왜병을 이끌고, 그의 의병부대를 공격하니 젊은 의병장 정시해(鄭時海)는 전사하고, 최익현을 비롯한 12명의 의사들이 적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일본군 사령부에 구치되었다.
이리하여 최익현은 우리 나라 법이 아닌 일본군 사령부의 선고를 받고, 대마도로 이송되어 일본 위수영 경비대에 수감되었다.
그는 대마도에서, 일본이 주는 일체의 음식을 물리치고, 단식을 시작, 임병찬에게 그의 유언을 암기하도록 하여 귀국 후 임금에게 전하게 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제자들의 권고도 듣지 않고,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가 만든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
하고 굶어서 운명이니, 이때가 1906년 11월 17일 아침이었다. 그의 시신이 본국으로 돌아올 때, 부산항에는 수많은 동포가 나와, 통곡으로 맞이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重章)을 받았다. (가평의 역사 인물지 p4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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