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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리 마을명 : 잠곡동(潛谷洞), 천덕소(天德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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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3,106회 작성일 15-06-1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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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명 : 잠곡동(潛谷洞), 천덕소(天德沼)

현재 안전유원지가 있는 마을이 잠곡서원이 있던 곳이며, 유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여 추모비을 세우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마을 이름도 잠곡동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곳에는 청평 내수면 연구소가 있고, 담수어(淡水魚)의 생태와 번식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민물고기의 치어(穉魚)를 길러 강이나 하천에 방류함은 물론 담수어 양식방법의 보급을 통하여 내륙 농어민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이 잠곡동에는 안전유원지 안의 웅덩이인지 현재 내수면연구소 부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잠곡 선생의 집 앞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10여년 동안 인연을 맺은 물고기가 승천하면서 보답으로 인조반정과 선생의 출사(복권)를 예고하여 주었다고 한다. 잠곡선생이 재출사 후에 그 연못을 하늘의 큰 덕을 입은 연못이라 하여 천덕소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2000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예정).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 본관은 청풍(淸風), 정우당(淨友堂) 김식(金湜)의 4대손인 흥자(興字)의 아들로 선조13년 7월 14일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효종 9년 9월 4일 남산 기슭 회현방 자택에서 작고,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선조 38년(1605) 사마시(司馬試), 인조 2년 (1624) 증광문과(增廣文科) 갑과(甲科)에 급제, 1606년 지평(持平), 문학을 거쳐 인조14년(1643)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38년 충청도 관찰사, 1639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인조 21년(1643)한성부 우윤(右尹)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소헌(昭顯)세자가 심양으로 불모로 잡혀갈 때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고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1645년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를 거쳐 1646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 대동법(大同法) 실시로 김집(金集)과 논쟁하고 퇴직하였다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실록청(實錄廳) 총재관(總裁官)으로 [인조실록]을 편찬하고 우의정을 거쳐 1652년 좌의정, 효종 5년(1654)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1655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잠곡(潛谷) 선생은 이미 10세 전에 물리(物理)를 터득하고, 12세에 소학을 읽던 중, 애물(愛物)사상을 굳혀, 후일 그의 경제사상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민본사상의 틀을 잡았다. 또한 성균관에 있을 때 연산군에 의하여 목숨을 잃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金宏弼, 鄭汝昌, 趙光祖)등 3현(三賢)과 주자학의 대가인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문묘에 모실 것과 우계(牛溪)선생의 신원(伸?)을 상소하였다. 후에 정인홍(鄭仁弘; 광해군의 등극에 결정적 공을 세워,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등이 이황 등의 문묘배향(文廟配享)에 반대하자, 정인홍을 청금록(靑襟錄 : 당시 유생들의 명단)에서 삭제하여 하옥되었다가 방면된 후, 가평의 청평 잠곡동(潛谷洞)에 은거하여 스스로 농사짓고, 숯을 구워 서울에 내다 파는 등 백성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시 백성수탈의 방법이던 공물법(供物法)을 폐지하고, 미포(米布)로 대납하는 대동법을 충청도에서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그 후 1651년 충청도와 1657년에 전라도 연안지방에 이를 실시하였다.

또한 관상감 제조(提調)재직 시에 한광일(韓光一)이 구해온 서양의 신역법(新曆法)인 [신역효식(新曆曉式)]을 보고 400여년간 사용해오던 구역법(舊曆法)의 개정을 건의하여, 1653년부터 신헌력(新憲曆)이 시행되어 사(四)계절의 변화를 일상생활에 맞출 수 있게 하였으며, 수차(水車)의 사용을 건의하여 1644년 황해·평안도에서 시행케 하였으며, 1651년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건의하여, 서울 서북지방에 유통케 하였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하여, 서적의 간행을 하게 하였다.

그의 경제사상은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柳馨遠)에 큰 영향을 끼쳐 실학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고,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병략(兵略), 복서(卜筮), 율역(律曆)에 정통했다.

가평의 잠곡(潛谷)서원, 미원(迷原)서원, 개성의 숭양(崧陽)서원, 강동의 청계(淸溪)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잠곡선생은 청평에 은거하면서 농사도 짓고 숯도 구우며 후학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하루는 밭에 씨 뿌리고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집 앞의 천덕소 연못가의 바위 위에 고기 한 마리가 펄떡거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잠곡선생은 밥 한 숟가락을 떠서 빈 사발에 넣어 물고기에게 주었다. 그 후 이따금씩 고기가 올라와 잠곡선생이 주는 밥을 먹고 사라지는 일이 이어졌고 이렇게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숯을 팔러 서울로 가게 되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물고기와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다가 그치고 햇빛이 연못을 비추자 무지개가 섰다. 그 무지개에는 10여년 동안 잠곡선생이 밥을 주던 물고기가 무지개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고기는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오늘 승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저의 조그만 보답을 하려 합니다. 상경하시는 즉시 궁궐을 찾아가서 새로 등극하신 왕에게 선생의 소신을 말씀하십시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라고 말한 다음 승천하였다고 한다. 그 후 잠곡선생은 상경하여 인조반정을 알게 되고 새 임금을 만나 개혁정책을 진언하고 재등용되어, 대동법 시행 등의 백성을 위한 시책을 베풀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가평의 사랑방 이야기」13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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