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은 나의 길 - 이정은6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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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은 나의 길 - 이정은6의 이야기

2020.06.02. 08:53 32,329 읽음 비밀글
LPGA는 오늘 공식홈페이지(lpga.com)을 통해 이정은6 선수의 '일인칭 스토리'를 런칭했다.
지난 번 고진영 선수의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담은 이야기가 큰 호응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이정은6 선수의 이야기도 못지않은 감동적인 사연을 담았다.
앞으로도 LPGA는 선수들의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그들의 언어로 전달할 예정이다.
아직 남은 나의 길
-이정은
6
모든 삶에는 전환점이 있고
,
선택의 갈림길이 있다
.
눈 앞에 보이는 넓고 안전하며 쭉 뻗은 길을 택할지
,
아니면 결말을 예측하기 어려운 좁고 울퉁불퉁하며 굽이친 길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
하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그 여정이 얼마나 큰 차이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
나는
9
살에 골프를 시작했다
.
아버지의 지인이셨던 티칭프로님이 골프를 시켜볼 것을 권하셨다
.
부모님 역시 내가 바깥에서 운동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트럭을 운전하셨다
.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입으셨다
.
당시의 어린 나는 아버지가 결정한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
당시 아버지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수도
,
인생을 포기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아버지는 새로운 환경에 대해 배우고 적응하며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셨다
.
그 결정은 아버지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
그 모습은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사춘기를 겪는 또래 친구들처럼
, 12
살이었던 나는 골프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
그 당시 나는 골프라는 운동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
떠밀려 배우는 기분이었다
.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3
년 동안 골프를 쉬었고
,
부모님은 이해하셨다
.
부모님은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셨다
.
나는 대부분 한국하면 떠올리게 되는 서울같은 대도시와는 거리가 먼 전라남도 순천에 살았다
.
순천에서의 생활은 느리다
.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안다
.
그 지역을 떠나는 사람도 많지 않고
,
모든 이웃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
15
살 때 다시 골프를 시작했는데
,
이번에는 내가 원한 것이었고 티칭프로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
골프를 충분히 잘 하게 된다면 순천에서 티칭프로로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70
대 초반의 스코어를 내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운동을 했다
. 17
살이 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의 유명한 감독님께서 학교와 골프를 병행할 수 있는 골프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들어오겠냐고 제안하셨다
.
그것이 나의 첫번째 갈림길이었다
.
나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
아버지의 존재는 내가 집에 머무를 수 있는 확실하고 완벽한 이유였다
.
휠체어에 앉아 계신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싫었다
.
사실
,
나는 좀 무서웠다
. ‘
내가 그곳에서 훈련할 만큼 충분한 실력일까
?’, ‘
서울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까
?’, ‘
내가 향수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
등등 걱정이 많았다
.
두렵긴 했지만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
그리고 그것이 나의 전환점이었다
.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
순천에서 벗어나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 새로운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공부와 훈련을 할 수 있을 만큼 단련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
이전 보다 골프 실력도 훨씬 좋아졌다
.
순천에서는 지역의 작은 주니어 대회와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했지만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었다
.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
나는 최고의 아마추어들이 출전한 전국 대회에서 우승했다
.
그리고 그 순간
,
내가 좋은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원래 계획이었다면
19
살쯤
,
모든 것이 편안하고 친숙한 우리 집 근처에서 티칭프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
선택의 결과
,
나는 내가
6
번째로 이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KLPGA
의 투어 선수가 됐다
.
거기서 내 이름 끝에 있는 숫자
6
이 유래되었다
.
난 숫자에 불과했다
.
그 후
,
나는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 KLPGA 2
년차 때 나는
4
번 우승했고 상금왕을 기록했다
.
그 해 여름
,
나는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트럼프내셔널에서 열린
US
여자오픈에도 출전했다
.
그 대회는 나의 첫 메이저 참가였고
,
또 미국에서 다른 선수들과 경기한 첫 경기였다
.
나는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 주었고
,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했던
‘6’
을 지키기로 했고 모든 사람이 내 이름 뒤의 숫자에 대해 궁금해했다
.
비록 영어를 전혀 못했지만 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나는 그 해의
US
여자오픈에서
5
위를 했고
,
토요일에 마지막 그룹에서 경기도 했다
.
그때 나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
2018
년에는
KLPGA
에서
2
승을 했고 또 다시 상금왕을 차지했다
.
그리고 내 인생의 또 다른 갈림길과 마주했다
.
한국에 머물면서
KLPGA
대회에서 우승하고 익숙한 사람
,
문화
,
언어 속에서 경기하며 가족과 함께 음식이나 교통
,
환전
,
시간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
아니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도전하기 위해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단체인
LPGA
의 퀄리파잉 스쿨에 갈 수도 있었다
.
나는 골프가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긴장되고 조금은 두려웠다
.
어린 시절에 내가 더 일찍 고생스럽고 불확실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 LPGA
에서 뛸 수 있었을까
?
아마도
2019 US
여자오픈에서 우승하거나 루이즈 서그스 롤렉스 올해의 신인상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지금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편하지는 않다
.
나는 신인 시절 내내 나의 영어 실력에 대해 기자들에게 미안했다
.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정도는 아니다
.
지난해 가을 롤렉스 어워즈에서 신인상 수상 연설을 하며 감정이 격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
투어를 시작한 당시부터 낯설고 이국적이었던 영어 단어와 구절을 외우며
3
개월 동안 연설문을 연습했다
.
내게는 그 연설을 영어로 해서
,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나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것이 중요했다
.

모든 연설을 마친 후
,
압도될 만큼 큰 박수를 받았다
.
눈물나는 순간이었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
올해는 내 영어 실력이 더 좋아질 것이다
.
다시 우승할 때는 바라건대 정확한 표현으로 나의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쉽거나 편하진 않았다
.
하지만 가치있는 길은 늘 그렇다
.
이제
24
살 밖에 되지 않은 내가 오래전에 배운 교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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